기자명 궁인창
  • 입력 2024.03.28 15:08

한단지몽(邯鄲之夢) 근거지 한단 답사

2023년 11월 28일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한단(邯鄲)시 한단시립박물관과 무령총대를 관광하고 여도국제(麗都國際)호텔 911호 방에 짐을 풀었다. 여행을 온 지 여러 날 되어 점차 긴장도 풀리고 온몸이 조금씩 쑤셨다. 저녁을 먹고 호텔에 들어와 깜박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새벽 1시라 마땅히 나갈 곳도 없고 해서 핸드폰을 켜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중국 고사성어를 보았는데, 사마천 《사기》 강좌 시간에 김영환 교수가 자주 말을 했던 곳이 이 동네였다.

중국 풍자소설 《침중기(枕中記》
중국 풍자소설 《침중기(枕中記》

한단은 중국 고사성어 3,000여 개 중에서 1,584개가 생겼을 정도로 역사가 오래된 도시다. 춘추시대에는 위(衛) 나라의 도읍지였고, 전국시대에는 조나라의 중심지였다.

한단지몽은 당나라 심기제(沈旣濟, 750~800)가 지은 중국 전기소설 《침중기(枕中記》에서 나오는 소설 내용의 일부이다. 당나라 현종 개원(開元) 19년(731년) 노생(盧生)이란 선비가 과거를 보러 길을 떠났다가 그만 길을 지나쳐 숙소를 놓치고 허름한 장터 주막에 이르렀다. 주막 주인이 나와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며 놀라운 비밀을 알려주었다.

노생은 꿈인가 하면서 도교 도사 뤼옹(呂翁)을 만나 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도교의 도사인 뤼옹은 젊은 노생의 옷이 초라하고 남루해 슬며시 말을 붙였다. 노생은 말을 청산유수처럼 잘하며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갑자기 자기는 산둥에서 왔다며 한탄하고는 “남자가 대장부로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은 떵떵거리며 큰소리도 치고 살아야 하는데” 하면서 한숨을 내 쉬었다. “세상일에 순탄하고 부귀영화도 누려야 하는데, 이렇게 순탄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곤궁해졌다.”라고 슬프게 말했다.

뤼옹은 노생을 바라보고는 “당신은 피부색도 좋고, 몸이 뚱뚱하고 건강하게 보인다. 말도 익살스럽게 잘하고 인기도 많게 보인다. 모든 것이 편안하게 보이는데 왜 피곤한 삶을 살았다고 개탄을 하며 웁니까?”하고 반문했다.

노생의 꿈(사진:河北新聞)
노생의 꿈(사진:河北新聞)

노생은 “이제까지 구차하게 살았을 뿐인데, 무슨 편안함이 있겠습니까?”하고 말하면서 도사가 더 편해 보인다고 말했다. 뤼옹은 “나는 치열하게 수도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편안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했다.

노생은 “남자라면 공적을 세우고, 명성을 떨치고, 장수가 되어 재상이 되고, 정상을 차지하고, 먹고, 소리를 골라 듣고, 씨족을 더욱 번창시키고, 가계를 더욱 풍요롭게 해야 편안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원래 경학에 뜻을 두고 육예를 두루 익혔습니다. 당연히 젊고 힘이 강할 때 높은 벼슬과 높은 봉록을 받아야 하는데, 지금은 장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밭을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이게 피곤한 게 아니고 뭐가 편안하다는 말입니까?”하고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당나라 심기제(沈旣濟) 《침중기(枕中記》(사진:위키백과)
당나라 심기제(沈旣濟) 《침중기(枕中記》(사진:위키백과)

오래 대화를 하다 노생이 조금 피곤하다고 말을 하였다. 이때 장터의 주막 주인은 이미 황량을 쪄서 요리를 막 시작하려고 했다. 도사 뤼옹은 자신의 보따리 꾸러미에서 작은 베개를 꺼내 노생에게 건네주었다. “만약 당신이 이 베개를 베고 누우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장원급제도 하고, 영화롭고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라고 말을 건넸다.

노생은 하품하면서 뤼옹의 말을 듣자마자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에 그만 베개를 독수리처럼 빠르게 낚아챘다. 그리고는 들뜨고 기쁜 목소리로 “내 소원을 들어준다지!”하면서 바로 깊은 잠에 빠졌다.

청자상감무늬 베개, 신안선 해저 인양 유물(사진:국립중앙박물관)
청자상감무늬 베개, 신안선 해저 인양 유물(사진:국립중앙박물관)

노생은 잠결에 빠지면서 “베개는 도자기인데 양 끝에 구멍이 뚫려 있네!” 말하였다. 노생은 베개 양 끝에 구멍이 뚫려 있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환하게 뚫린 것을 보고 몸을 일으켜 곧바로 고래등 같은 으리으리한 기와집으로 들어갔다.

노생은 청하 최 씨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아내의 자태가 아름답고, 아이를 하나둘씩 낳아 주었다. 노생은 아내가 시키는 대로 공부를 하여 과거에 급제했다. 꿈속에서 그는 자신이 장원이 되는 광경을 본 듯 다홍색 옷을 입고 오색 말을 타고 그 뒤를 따라 한 무리의 시종들이 위풍당당하게 장원문을 가로질러 궁궐에 들어갔다.

이듬해 등사갑과에 들어가 천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고 교서랑으로 임명되었다. 이어 위남현위(渭南縣尉)를 추대되고, 어사기거사(御史起居舍) 감찰 겸 직함(诰衔)으로 자리를 옮겼다.

노생은 거처를 산시성으로 옮겼다. 노생은 일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여 산시성에서 황하를 개통하였다. 그리고 80리 먼 곳까지 물을 보내 여러 사람에게 물을 공급했다. 그동안 물이 없어 고생한 사람들은 많은 이익을 얻어 노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이후, 노생은 변주 영남 채록사로 옮겼다.

이때 신무황제는 오랑캐와 토번의 신노라와 용망포가 군대를 일으켜 자사를 함락시키고 절도사 왕군 夐은 그들과 하황에서 교전하다가 패배하여 황제가 새로운 장수를 임명하려 하자 노생을 어사중 승하서농우절도사로 봉하여 군사를 통솔하게 하였다.

노생은 융적(戎狄)을 물리치고, 강토 9백 리를 개척하여 급소에 3개의 큰 성루를 세웠고, 북부 변경의 주민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하여 석기공을 새기고 조정에 돌아왔다. 황제는 노생의 공로를 기록하여 상을 내리게 하고 그를 사부로 임명하였다. 그는 조정에서 권세가 높고 명망이 높아져 문무 군신들이 주목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노생을 시기하던 한 재상이 노생의 승진을 미워해 유언비어로 그를 헐뜯기 시작했다. 황제는 거짓 소문을 듣고 노생을 단주자사(端州刺史)로 내려보냈다.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황제는 노생이 그립고, 소문이 잘못이라는 상소를 받아 노생을 조정에 불러 호부상서로 다시 임명했다. 노생은 충직하게 황제를 보필해 얼마 지나지 않아 중서시랑과 동중서문하 평장사를 지내고 소령숭, 배광정과 공동으로 국가의 정치를 관장하였다.

10년 동안 노생은 재상으로 정책에 깊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노생이 변방의 장군과 함께 황제에게 반대하여 모반을 도모한다는 밀고가 들어왔다. 노생은 다시 역적이 되어 어린 옥졸에게 포박되어 끌려가게 되었다.

노생은 울면서 “우리 집은 산둥에 있고, 몇 뙈기의 비옥한 밭이 있어 먹고 살 걱정도 없는데, 왜 내가 이리 고생을 사서 높은 벼슬과 봉록을 추구합니까? 지금 내 꼴을 보니 짧은 저고리를 입고 푸른 말을 타고 한단 길을 걷는 편안한 생활이 그립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칼을 들고 자살하려다 아내와 아들이 말리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당시 노생의 공적을 알고 있던 환관이 노생의 무고함을 황제에게 알려 노생은 극적으로 사형을 면제받았다. 노생은 조정에서 쫓겨나 변방으로 밀려났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은 죄도 없이 모두 처형되었다. 세월이 지나 늙은 환관이 황제에게 지난 일을 말했다. 황제는 노생을 소환하여 중서령으로 제수한 뒤 연국공에 책봉하고 다시 은총을 내렸다.

《침중기(枕中記》(사진:위키백과)
《침중기(枕中記》(사진:위키백과)

노생은 50여 년 동안 영남에서 두 번이나 멀리 떨어져 다시 재상 자리에 올랐고, 조정 안팎을 드나들며 높은 벼슬과 높은 은덕을 누리며, 한때 비길 데 없는 복덕을 누렸다. 노생은 평생 검소했지만, 한때 사치스럽고, 방탕하고, 노는 것을 좋아했다. 집안의 여인은 모두 미인이었다. 집안에 웃음이 넘쳤다.

두 차례에 걸쳐 황제가 하사한 양전갑제, 미인명마 등이 그의 높은 귄위를 보여주었다. 그의 아들 노검, 노전, 노위, 노초, 노의는 모두 재주가 뛰어났다. 노검은 진사에 급제하여 고시원외가 되었고, 노전은 시어사, 노위는 태상승, 노초는 만년위, 노의는 28세에 좌정승이 되었다.

그들의 처가는 모두 천하에 이름난 대족(大族)이며 손자가 10여 명이나 되었다. 노생은 나이가 들어 병이 깊어졌다. 이제는 꿈속에서 노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노생이 권력의 쾌감에 젖어 초심을 잊었다.

어느 날 노생이 장원문에서 그를 맞았던 여섯 명의 시종들을 데리고 가마를 메고 집을 나서자 문하생들은 아첨을 떨었다. 그들은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며 승진을 요구하거나, 다른 사람을 헐뜯었다. 노생이 대권을 쥐고 있을 때 승진을 하사하고, 다른 사람을 면직하고, 목을 베는 것은 한 마디로 손사래를 치는 일이었다.

노생은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치와 권력, 끝없는 뇌물과 송가, 선물로 받은 미인을 만끽했다. 황제는 우연히 재상 노생의 저택을 돌아보았다. 황제는 노생이 뇌물을 탐하고, 사람들을 모아 패당을 지어 사리를 도모하며,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놀아 그 죄악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화가 치밀어 노생의 구족을 멸하고, 능지처참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노생은 꿈속에서 지하세계로 내려갔다. 그의 제자들은 모두 귀신이 되어 노생을 맞이했다. 노생은 지하에 도착해 살생부를 장악하고 있던 판관을 만났다. 그런데 뜻밖에도 판관은 전에 노생을 탄핵했던 어사 판관이었다. 판관은 노생의 몸을 가르고, 그의 마음이 검은지 붉은지를 검사했다. 노생은 열여덟 겹의 지옥에 처박혀 영원히 환생할 수 없다는 절망의 비명을 지르며 끝없는 어둠 속에 파묻혔다. 그런데 그만 모든 것이 꿈이었다!

노생은 나이가 들어 황제에게 고향으로 제발 돌아가게 해달라고 여러 번 간청했지만, 황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하루는 노생이 병이 났는데, 문안객이 끊이지 않아 문 앞 도로에 모두 서 있고, 명의가 진료하였다. 귀한 약품이 집에 다 있었다.

임종 직전 노생은 황제에게 글을 바쳤다. “소신은 산둥의 비천한 일개 선비로 평범하게 밭과 채소를 가꾸기를 원했으나, 우연히 성조 때 좋은 운을 만나 벼슬아치의 순서를 얻었습니다. 황제의 총애를 받아 장수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조정 안팎을 누비며 오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은혜에 도움이 되지 못함을 깊이 느끼며, 나라의 기운이 점차 약해져 도적이 날뛰게 될까 봐서 온종일 살얼음판을 걷듯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소신은 날이 갈수록 늙어가는 것 같습니다. 올해 80세가 넘었고, 관직은 삼공(三公)을 역임했고, 종루도 멈출 때가 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기진맥진하여 거의 다 죽었습니다. 위의 답변에 성의가 없고 깊은 은혜를 헛되이 지고 성대를 떠나니 미련이 남습니다. 이에 삼가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노생을 글을 다 읽은 황제는 조서를 내려 “경은 준재현덕(俊才賢德)을 나의 중요한 보좌로 삼고, 출사하여 번국(藩國)에 군림하고, 지난 20년 동안 내가 평온하게 지낸 것은 모두 경의 힘쓴 덕분이다. 경의 병환를 매일 듣고 있는데, 오늘 표기대장군 고력사를 보내 위문하니, 빨리 쾌차하여 일어나기 바란다. 짐의 희망이 허사가 아니기를 바란다.”라고 글을 내렸다. 노생은 황제의 어의(御醫)가 지켜보는 가운데 80세로 평온하게 생을 마쳤다.

청자베개(瓷枕)(사진:위키백과)
청자베개(瓷枕)(사진:위키백과)

노생은 한참 몸을 뒤척이며 기지개를 하며 깨어나 장터 주막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베개를 건네준 도교 도사 뤼옹은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주막 주인은 찌고 있는 황량 쌀밥이 아직 덜 익었다고 조금만 더 참으라고 멀리서 손짓했다.

노생은 손으로 주변의 물건을 만졌을 때 내가 무간지옥에 있지 않고 살았다는 것을 그제 깨달았다. 그때 뤼옹이 있다가 “좋은 꿈을 꾸지 않았습니까! 인간 세상의 일도 당신의 꿈속의 상황과 똑같다!”라고 말했다. 노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생은 한참을 생각에 잠긴 뒤 도사 뤼옹에게 “꿈속에서 모욕을 당하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아들 손자의 사랑을 꿈속에서나마 다 보았습니다.”라고 고백했다. 뤼옹은 아무 말 없이 노생을 보며 “인생은 다 그런 것이라네!”라고 말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노생은 도사 뤼옹에게 “제가 어찌 후생이 선생의 가르침을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뤼옹은 노생에게 “인생길을 조심해 살펴 가세요!”라고 말하며 조용히 떠나갔다.

《침중기(枕中記》(사진:바이두백과)
《침중기(枕中記》(사진:바이두백과)

노생은 뤼옹의 베개를 베고 잠들었다가 꿈속에서 자기가 살아온 80년 세월을 모두 보았다. 노생은 인간의 삶이 힘들고, 일생이 무척 긴 것 같아도 부귀영화나 영고성쇠(榮枯盛衰)가 한바탕 꿈에 불과하고 부질없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가게 주인은 과거를 보러 가는 노생에게 함께 가게를 운영하며 평범하게 살자고 말했다. 노생은 환상의 꿈을 꾼 후에도 여전히 과거를 보러 상경을 선택했다. 그는 만약 장원에 합격한다면, 반드시 자신을 닦고 선을 쌓고 덕을 쌓을 것이며, 백성을 위해 복을 찾고, 정의롭고 청렴한 관리가 될 것이며, 만약 중하지 않으면 다시 한단 옛길로 돌아가 깨어날 수 없는 사람들을 깨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설화는 이미 육조시대(222~589)의 동진의 간보(干宝)의 《수신기(搜神記)》에서도 나온다. 중국사상, 특히 노장사상과 도교가 설파하는 무위(無爲)나 도(道), 혹은 不老不死를 신봉한 神仙思想에서 발단한 민간전승은 인과응보를 강조했다. 《침중기》보다 나중에 당나라 이공좌(李公佐)의 소설 《남가태수전(南柯太守伝)》, 명나라 희곡 《남가기(南柯記)》가 모두 같은 구상이다. 이런 내용이 신라 《삼국유사》에서는 동물과 자연 정령으로 나타나 부처님 법의 영험함을 강조했고, 다시 일본에 건너가 많은 희곡 작품을 탄생시켰다.

한단(邯鄲)시립박물관 전경
한단(邯鄲)시립박물관 전경

필자는 한단(邯鄲)에서 노생을 만난 이후 자꾸 베개를 만지는 묘한 습관이 생겼다. 그동안 많은 일을 했지만, 오랜 세월을 꿈속에서 헤매고 살았구나 하는 반성도 했다. 지금도 노생이 베고 낮잠을 청한 도자기 베개를 붙들고 하염없이 한단지몽(邯鄲之夢), 한단지보(邯鄲之步)를 꿈꾸고 있다. 그런데 베개가 도자기가 아니라 폭신한 베개라 구멍을 찾을 수가 없다! 아쉽다!

생활문화아카데미 궁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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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궁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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