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덕의 선행은 소문이 나서 금강산으로 가는 길목마다 선비들이 나와 환영을 해주었다. 만덕은 정조가 내린 왕명 덕분에 식량과 편안한 숙소를 받았다. 그러나 금강산 가는 길이 멀어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날씨가 봄날이기는 하지만 밤이 되면 춥고 썰렁했다.만덕은 가마를 타고 가다 가마꾼이 힘든 장소를 지날 때면 가마에서 내려 걸어갔다. 선비처럼 말을 타고 빨리 갈 수가 없어 느리게 갔다. 금강산 가는 길은 고려 시대에도 활발하게 사람들이 왕래하여 큰길에 역과 원, 관아, 절 등이 있어 크게 불편함이 없었다.금강산 가는 사람들은 역이나
만덕을 가마에 태운 일행은 조선시대 6대로 중 2대로 인 경흥로를 거쳐 금강산으로 향했다. 경흥로는 한양에서 출발하여 수유리를 지나 누원점(樓院店), 축석령, 송우점, 파발막, 양문역, 김화, 금성, 창도역, 회양, 철령, 고산역, 안변, 함흥, 북청, 길주, 명천, 회령, 온성, 경원, 경흥, 서수라까지 이어지는 긴 도로이다. 경흥로는 한양 도성에서 김화를 거쳐 함흥과 북청을 지나 두만강까지 가는 먼 길이다.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1770년(영조 46년)에 상업 발달과 유통, 도로망의 정비를 표시한 《도로고(道路考)
한양에 머문 지 반년이 지난 만덕(萬德)은 1797년 3월에 영상 채제공과 장안 선비들의 환송을 받으며 금강산 유람에 올랐다. 만덕의 금강산 출발이 장안에 퍼지자. 선비들은 모두 그녀의 용기를 칭송하였다. 당시 시를 잘 짓기로 유명한 홍도(紅桃)가 그녀의 덕행에 감탄하여 길을 떠나는 만덕을 위해 칭송하는 시를 보내와, 만덕은 감사 인사를 전했다.女醫行首耽羅妓 萬里層溟不畏風又向金剛山裡去 香名留在敎坊中탐라 기생 행수 의녀는 만 리 높은 파도도 겁내지 않았네!이제 금강산으로 길을 향해 떠나니 꽃 같은 이름 교방에 남기네.홍도는 조선왕조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아들 태종의 처신을 못마땅히 여겨 태종 1년(1401) 윤삼월 11~15 일 사이에 한양에서 금강산으로 여행을 떠났다. 태종은 하륜(河崙, 1347~1416), 태조의 부마인 이거이(李居易, 1348~1412), 성석린(成石璘, 1338~1423), 조준(趙浚, 1346~1405), 이무(李茂), 이서(李舒) 등과 정사를 의논하다가 금강산을 신하들에게 묻는다.태종은 “중국 사신이 조선에 오기만 하면 반드시 금강산을 보려 하니, 무슨 까닭이오? 속담에 중국인이 이르기를 ‘고려국에 태어나서 직접 금강산을 구경하는
만덕은 부처님의 심오한 교리는 잘 모르지만, 순천과 해남 지역에서 온 승려들을 만나 부처님 법문을 듣고, 선비들을 만나 금강산 유람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만덕은 제주도에 표착한 청나라 사람들을 보면서 이웃에 있는 다른 나라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만덕은 화북포구 앞의 바다를 보면서 제주를 벗어나 육지에 나가보았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었다. 만덕은 한양도성에서 금강산유람록을 읽으며, 금강산의 절이 어떻게 생겼는지 항상 궁금했다. 그래서 선비들에게 금강산에 관한 궁금한 것을 질문했다. 조선은 뜨거운 여름철이 지나고 나면 항
매년 봄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나무를 심는다. 신라는 문무왕 17년(677) 음력 2월 25일(양 4월 5일)에 당나라 세력을 완전히 밀어내고 삼국통일을 이룩해, 이날을 기념하여 나무를 심었다.고려 시대에는 풍수 사상의 영향 아래 수도가 있는 개성 송악산의 땅기운을 보호하기 위해 소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과거에는 나무를 바닷가에서 바람의 피해를 예방하거나, 홍수를 방지하고, 땅기운이 약한 곳에 나무를 심어 보호해 주려는 비보(裨補) 조림을 위해 숲을 조성했다.조선에서는 경국대전이라는 법률에 나무를 심고 가꾸는 조항을 넣어 백성
정조와 효의왕후를 대궐에서 알현하고 나온 김만덕은 영상 채제공의 집으로 돌아간 이후, 한양도성의 선비들을 만나 교유하며 제주 한라산의 아름다움과 매년 세차게 불어오는 무서운 태풍 및 흉년의 참상을 모두 설명하였다.선비들과 대화하면서 만덕은 한양 사람들이 잘 모르는 “소랑 헵수다(사랑합니다)”“고끼다(숨 막히다)” “왕왕작작(떠들석~)” “혼잠녀(해녀)” “무사 경 고람쑤꽈(왜 그렇게 말하십니까?)”라고 제주도 사투리로 말하였다.그러면 선비들은 이상한 표정을 들으면서 제주의 풍속을 묻고 만덕은 소상하게 대답했다. 1653년에 만든 《
조선 후기 영의정을 역임한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은 18세인 1737년에 직장(直長) 오필운(吳弼運)의 딸 15세 동복(同福) 오 씨(吳氏, 1723~1751)와 혼인을 했다. 채제공과 부인 오 씨(吳氏)는 금슬이 너무 좋아 이웃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했다.정언 송영중이 영조가 한림권점(翰林圈點)으로 발탁한 채제공을 잡류(雜流)라고 논책하며, 채제공의 부친 채용일의 이름이 무신란의 옥사 초사(招辭)에 있으니, 역적과 연루된 자식을 발탁했다며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채제공은 사리를 따져 똑똑히 밝히는 상서
이백여 년 전 제주도는 심각한 기후변화로 1792년부터 1795년까지 4년간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고, 전염병이 번져 연일 아비규환(阿鼻叫喚)이 이어졌다. 매일 사람들이 굶어 죽고, 마을마다 병으로 죽어 이 기간에 죽은 자가 17,963명이나 되었다. 이런 심각한 상황은 육지 지역도 마찬가지였지만, 조정에서는 구호 곡물 1만 1천 석을 배에 실어서 보내지만, 수송 선단 12척 중 5척이 침몰해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제주도 거상 만덕은 이웃의 아픔을 돌아보면서 자기의 전 재산을 내놓고 육지에서 쌀을 구해 오도록 하였다. 당시 제주도는
제주도 사라오름 산정호수를 탐방하고, 제주해군호텔에서 이섬(李暹)의 〈표류기〉를 읽었다. 제주 정의현감(旌義縣監) 이섬의 표류기는 최부(崔溥, 1454~1504)의 《표해록(漂海錄)》보다 5년이나 앞선 놀라운 기록이다.제주 뱃사공의 노련한 솜씨로 표류한 사람들은 기적같이 고향에 돌아왔다. 고려 시대 정몽주도 공민왕 21년(1372) 서장관으로 정사 홍사범(洪師範)을 따라 중국에 갔다가 남경에서 귀국할 때 태풍을 만나 배가 13일간 표류하다 바위섬에 매달려 말다래를 씹으며 버텼다.정몽주의 목숨이 다 꺼져갈 때 지나가는 어부에 간신히
제주도 한라산 주변에는 368개의 신비한 오름이 있어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오름을 방문한다. 지난 2월에 친구가 한라산 녹담만설(鹿潭晩雪)을 보러 가자고 한라산 국립공원 탐방 예약을 신청했다.필자는 제주로 가는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탐방할 코스를 물었다. 탐방하는 곳은 문화재청이 2011년 11월 13일에 명승 83호로 지정한 사라오름이었다. 사라오름은 2010년 가을 한라산 국립공원 내에 있는 오름 40개 중에서 처음으로 개방된 곳이다.고문헌에는 “사라(沙羅, 紗羅, 舍羅) 오름은 한라산 고지대 백록담 동쪽 산록에 위치하며,
지도의 기원은 아주 오래되었다.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사람들은 홍수에 범람하지 않은 땅의 경계를 그림으로 그렸다.로마 공화국 카이사르 장군이 암살당하자, 19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가 권력을 계승하여 로마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저(B.C.E.63 ~ B.C.E.14)가 된다. 아우구스투스 시저는 ‘존엄한 사람’, ‘축복받은 사람’이란 뜻이다.초대 황제는 정치가 아그리파(B.C.E.63 ~ B.C.E.12)에게 군사적 목적에서 지도를 제작하라고 명한다. 아그리파는 뛰어난 행정가로 광대한 로마제국을 측량하고 지리 서
바다를 항해하려면 노련한 뱃사람의 오랜 경험과 튼튼한 배, 그리고 하늘에 대한 간절한 믿음이 있어야 배에 오를 수가 있었다. 오늘날에 제주도에 갈 때는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로 1시간이면 쉽게 갈 수 있지만, 당시는 한양 도성에서 제주도 화북포구까지 가려면 족히 두 달 이상이 걸렸으니 참으로 먼 길이었다.17세기에 큰 바다로 나가는 일은 정말 어려운 힘든 일이었다. 제주 목사 이익태(李益泰, 1633~1704)는 본관이 연안(延安), 자가 대유(大裕)로 1668년 문과에 급제하고, 1694년 제주 목사로 발령을 받았다.이익태는 1694
장보고글로벌재단에서 주최한 ‘세계인 장보고의 글로벌정신과 전남 미래발전방안’ 연구를 위해 1박 2일 워크숍에 참가하여 진남관 전시관과 이순신 자당기거지, 오충사 사당을 관람하고 1시간 30분 걸리는 고흥반도 발포진 유적지를 방문하려고 버스에 올랐다.여수에서 고흥반도로 가는 길은 주변 바다 경치가 정말 아름답고 공기가 깨끗하고 신선했다. 고흥군은 고흥반도와 230개의 섬이 있고, 외나로도에는 나로호우주센터가 있다. 현재 고흥군의 인구는 63,000명이나 우주항공 중심도시로 도약하기 위한 인구 10만 명을 목표로 설정했다.고흥군은 고흥
장보고글로벌재단에서 주최한 ‘세계인 장보고의 글로벌 정신과 전남 미래발전방안’ 연구를 위해 모인 유적답사 단원들은 여수 진남관 전시장을 돌아보고, 다음 방문 장소인 ‘이순신 자당기거지’를 가려고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운전기사는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방문지를 찾지 못하고 버스를 송현삼거리에 있는 웅천 이순신공원 주차장에 도착했다.버스 기사는 출발할 때 내비게이션에 ‘자당공원’을 입력했으나 내비게이션은 이순신공원을 알려주었다. 황상석 박사가 자당공원 가는 길을 자세하게 알려주어 버스는 2분 만에 여수 송현초등학교 앞에 있는 자당공
장보고글로벌재단에서 주최한 '세계인 장보고의 글로벌정신과 전남 미래발전방안'을 연구를 위해 지난 21일부터 22일까지 1박 2일 위크숍에 참가했다. 이번에는 여수와 고흥반도 발포진, 순천 지역 유적답사를 했다. 종고산(220m) 아래 위치한 여수 진남관은 지하 발굴조사를 하고 있어 사진만 남겼다. 조선 후기 전라좌수영 안에는 78동의 건물, 민가 2024호, 우물 9곳, 연못 1곳이 있었지만, 모두 사라지고 정면 15칸(54.5m), 측면 5칸(14m), 68개 기둥의 웅장한 목조 건물 진남관만 남았다.이순신 장군이 지휘소로 사용한
2023년 11월 28일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한단(邯鄲)시 한단시립박물관과 무령총대를 관광하고 여도국제(麗都國際)호텔 911호 방에 짐을 풀었다. 여행을 온 지 여러 날 되어 점차 긴장도 풀리고 온몸이 조금씩 쑤셨다. 저녁을 먹고 호텔에 들어와 깜박 잠이 들었다.눈을 뜨니 새벽 1시라 마땅히 나갈 곳도 없고 해서 핸드폰을 켜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중국 고사성어를 보았는데, 사마천 《사기》 강좌 시간에 김영환 교수가 자주 말을 했던 곳이 이 동네였다.한단은 중국 고사성어 3,000여 개 중에서 1,584개가 생겼을 정도로 역사가
중국 베이징 유리창 문화거리는 민국(民國, 1912~1949년 10월) 시기에 화평문(和平門)이 세워지고, 신화가(新華街)가 건설되었다. 유리창 문화거리에서 고서적, 서화, 골동품 등 많은 점포가 다양한 물품을 보유하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필자는 가게가 얼마나 있는지 궁금해 가이드가 질문했더니 가이드는 140개의 오래된 전통 점포(라오쯔하오, 老字号)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점포에는 유명한 서예가의 글씨가 많고, 공원 벽에도 많은 글씨가 남아 있었다.라오쯔하오는 오래된 전통 점포, 전통 상표, 전통 브랜드로 국가가 100년 이
핑야오고성 성황묘 침전을 구경하고 나와 후원으로 걸어가니 동서 양쪽에 부엌신을 모시는 조군전(灶君殿)과 재신전(财神殿)이 있었다. 오후 5시 30분 관람 마감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와 빠르게 전각을 돌아보고 사진 촬영을 했다.우리나라에서는 조왕을 부뚜막신, 조왕할머니로 불렀다. 옛날 돌아가신 장모님은 새벽 3시에 일어나 조왕 단지에 정화수를 갈아주고, 초를 밝혀 밥을 짓고 조왕님께 정성껏 기도하였다.필자는 장모님께 “조왕님께 무슨 기도를 올리세요?” 하고 물어보면, 장모님은 “우리 막내 건강하라고 기도했어!”라고
임진전쟁에서 많은 사람이 다치고, 이순신 장군이 조총에 맞아 절명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문헌을 조사했다. 일본인이 조총을 처음 본 것은 1543년 음력 8월 25일(양력 9월 23일) 규슈 가고시마 남쪽에 있는 다네가시마(種子島) 카도쿠라 곶(門倉岬)에 표류한 명나라 무역상 왕직(汪直?, ~1559)의 난파선 때문이다.명나라 왕직은 五峰, 五峰船主라고 하며 휘주(徽州) 흡현(翕懸) 자림(柘林) 출신이다. 왕직은 1530년대에 남해에서 활동하던 상인 허동(許棟)과 이광두(李光頭) 밑에서 일했다. 허동과 이광두는 명나라 군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