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황상석 기자
  • 입력 2024.03.25 01:36
  • 수정 2024.03.25 06:34

이호덕 RS그룹(인도네시아) 회장의 창업성공스토리 –1

인도네시아로 이주, 49년째를 맞고 있는 이호덕 회장(75)은 협력을 통해 동반성장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인도네시아 화교와 국내 중소기업들과 협력을 통해 알차게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골프장 운영 및 아파트, 주택단지 건설과 택지 개발하는 부동산 종합개발업과 의료기기 유통 및 특수 장비를 판매하고 있다. 이 외에도 헬스케어업과 방위산업, 병원 운영, 벤처 투자 및 자원 개발하는 계열사 20개를 거느린 RS(로얄 수마트라) 그룹을 창업, 2022년 현재 1500명의 직원을 비롯하여 매출액 1억달러를 달성했다. 이런 공로로 2023년 장보고한상 어워드 국회의장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글로벌비즈뉴스(GBN)에서는 이호덕 회장의 창업성공스토리를 2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 주>

장보고한상 어어드 국회의장상 수상한 인도네시아 이호덕 RS그룹 회장
장보고한상 어어드 국회의장상 수상한 인도네시아 이호덕 RS그룹 회장

고향 선배 권유로 해외 진출에 눈 떠... 75년 인도네시아 이주

1975년 경남기업 직원으로 인도네시아에 첫발을 내디딘 이호덕 회장이 이 나라에  정착할 수 있도록 깨우쳐 준 인물이 고흥 출신 정치인 월파 서민호 국회의원이었다. 서 국회의원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을 나와 1946년 광주시장과 전라남도 지사를 지낸 정치인이다.

이호덕 회장은 1949년 11월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서 5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나 광주일고를 졸업한 수재였다. 그러나, 서울대를 두 번이나 낙방해서 의기소침하고 있던 1969년에 서 국회의원을 만났다. 서 의원은 고향 선후배를 모아놓고 식사하는 자리에서 이호덕 회장에게 “앞으로 동남아가 비전이 있다”라면서 “이 지역을 주목하라”고 강조했다.

[사진: 세누한 12회]
[사진: 세누한 12회]

이 회장은 지체 없이 한국외국어대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에 진학했다. 1975년에 졸업과 동시에 취업 및 결혼 등 겹경사를 성취했다. 상명여대 무용학과 채영애 여사를 만나 결혼하고 경남기업 인도네시아 근무 인력으로 특채됐다.

숲의 보물섬 칼리만탄 동부 오지 근무 자원

그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사무실 근무를 할 수 있었지만, 현장의 일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깔리만딴 섬 근무를 자원했다. 이 섬의 남부는 75%가 인도네시아이고 27%가 말레이시아로 나눠져 있다.

이 회장이 근무한 곳은 칼리만탄 동부 해안 작은 섬 타리칸에서 스피드 보트로 6시간 가야 닿을 수 있는 오지였다. 이곳은 10만 ha 규모 경남기업 벌목 사업장을 운영하는 현장 사무소가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나무 성장 속도가 우리나라의 6배. 한국에서는 묘목을 심어 목재로 쓸 때까지 50년이 걸리지만 인도네시아는 7~8년이면 가능하다. 이 때문의 ‘숲의 보물섬’이라고 불렀지만, 하늘을 덮은 울창한 숲속에는 독충과 맹수가 우글거리는 밀림이었다.

그는 20대 후반으로 이곳에서 가슴 두근거리는 삶의 에너지를 느꼈지만 함께 입사한 동기 2명은 인도네시아 배치된 지 1년도 채 안 되어 그만뒀다.

그는 대학에서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했기 때문에 현지 직원들은 물론, 거래처 사람들과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이 때문에 현장 사무소에 중장비 부품과 부식, 의류 등을 납품하는 소규모 가게들을 운영하는 현지인 사장들과 거래하면서 인도네시아의 문화와 인간관계를 배웠다. 비록 현지 거래 업체 사장들이 비록 저학력이지만, 특유의 상술로 사업을 키워나가는 비결을 터득했다.

반면 한국 주재원의 대부분은 현지어를 몰랐다. 이 때문에 현지인 사무직원들의 농간이 심했다. 디젤 및 사무실 비품, 식재료를 사들일 때 돈을 빼돌리고 커미션을 챙겼다. 이들의 부정행위를 그만 볼 수 없었던 그는 담당자를 일괄 해고했다. 한꺼번에 사무직원들이 그만두면 현장이 마비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훨씬 잘 돌아갔다. 이 회장은 현장의 업무가 마비될 것에 대비해 대응책을 미리 준비했기 때문이다.

입사 4년 만에 1천 명 직원 통솔하는 소장으로 승진

인도네시아인들은 다른 열대지역 사람들처럼 행동이 느린 편이지만 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편이다. 공개된 장소에서 자기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그는 겸손하면서 배우겠다는 자세와 솔선수범한 행동으로 보여주면서 현지인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했더니 효과가 훨씬 뛰어났다.

그는 77년 대리가 된 지 두 달 만에 과장으로 승진, 현장소장으로 임명됐고 79년에 차장으로 승진하면서 1천 명의 직원을 통솔하는 인도네시아 본부 사무소장을 맡았다. 불과 4년 만에 샐러리맨의 신화를 달성했던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무한한 잠재력을 보고 자신의 구상대로 사업을 하고 싶은 욕망이 내면에서 꿈틀거리던 1981년 겨울에 사표를 냈다. 본사에서 사표를 반려하고 임원 발령을 내주겠다면서 회유했지만, 고집을 꺾지 않으니까 나중에는 비리를 저질렀는지를 조사까지 했다. 이 회장은 경남과 경쟁 관계에 있는 품목을 취급하지 않으며 회사의 거래처 정보를 이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그만뒀다.

1988년 10월 노태우 대통령 인니 방문시 영부인께서 방문
1988년 10월 노태우 대통령 인니 방문시 영부인께서 방문

81년 사표 던지고 창업... 매일 자카르타 새벽 도매시장 출근

이 회장은 회사를 그만두고 매일 자카르타 새벽 도매시장 ‘파사르 파르’ 로 출근, 현지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을 체험했다. 이 시장은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몰려든 바이어들이 물건을 구매하느라 전쟁터를 연상할 정도로 붐볐다. 그는 새벽 4시쯤 일어나 넥타이까지 맨 정장 차림으로 5시쯤 시장에 도착해서 2시간 정도 시장을 돌아다니며 사업 아이템을 찾았다. 이곳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좋아하고 유행하는 상품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한 시장조사였다.

한 달쯤 시장 순례를 마치고 시장 골목의 작은 식당에 가서 닭 육수를 끓어낸 국수에 데친 채소를 올린 ‘미아얌’을 먹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현지인이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이 회장에게 말을 걸었다.

”어느 나라에서 온 분이냐?, 무슨 일로 아침 일찍 이런 곳에서 식사를 하느냐“고 물었다. 첫 현지인과 인연을 맺게 됐다.

이 회장은 동업 형태로 한국과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의 옷과 신발, 문방구 등을 수입하는 ‘메이와 트레이딩’이라는 명함을 건넜다. 이후 상인들로부터 한국산 제품을 구입해 줄 수 있느냐는 요청을 받았다.

이 회장이 현지인과 첫 번째 거래는 1982년 7월에 도매상을 한 화교인 행키 형제로부터 양말 500켤레와 손수건 1,000장을 주문을 받아서 팔았다. 다른 시장 상인들과 친해지면서 속옷 등 다른 품목으로 넓혔다.

2006년 10얼 깜보디아 부수상 방한시 동행 안내, 축산 현장 방문
2006년 10얼 깜보디아 부수상 방한시 동행 안내, 축산 현장 방문

화교 출신 도매상한테 양말 및 손수건 팔면서 상술 터득

파사르 파르 시장은 전쟁을 피해서 노동자로 이주한 화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 화교는 인도네시아 인구의 4%에 불과하지만, 경제권을 장악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예컨대 인도네시아 100대 부자 중 화교 출신이 80%를 차지하고 있다.

이 회장은 화교들과 거래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들의 인맥인 꽌시와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들은 신뢰를 바탕으로 거래하며 목숨까지 내놓고 도와주는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회장은 이들과 관계를 맺으려면 신의를 중시해야 한다는 기업가정신을 터득했다.

화교는 사업을 절대로 혼자 하지 않는다는 철칙을 갖고 있었다.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함께 어울려서 일을 도모하는 것이 특징이다. 많은 돈이 드는 사업의 경우 십시일반으로 함께 투자하면서 위험을 분산시키는 지혜를 발휘했다.

특정 분야에서 돈을 번 화교들은 능력과 성실함을 갖춘 다른 화교에 투자를 했다. 혼자 잘 먹고 잘 사기 위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공동체의 성공을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는 이들의 장사 비결은 상대방에게도 이익을 안겨주는 것이 특징이다.

이 회장이 세운 철강회사의 협력사 관계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이 회장이 세운 철강회사의 협력사 관계자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다. 

양말 편직기 등 각종 기계 판매, 신의 한수

행키 형제는 한국산 양말의 반응이 좋다며 인도네시아에서 양말을 생산할테니 기계를 들여와 달라고 부탁했다. 성수동 부성기계와 연락을 해서 양말 편직기를 판매하고 생산기술을 전수했다.

행키 형제의 성공은 시장 바닥에 빠르게 전파됐다. 이를 기회로 밀링과 에어프레셔, 스팀 보일러 등의 기계 주문이 줄을 이었다. 이처럼 이 회장은 인도네시아 화교의 꽌시는 물론, 국내 중소기업인들과 협력을 통해 동반성장을 하는 모델을 개척했다.

이 회장은 이들 화교 인맥의 도움으로 82년부터 3년 연속 50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게다가 1985년 3월에는 화교의 인맥을 통해 인도네시아 직업훈련소에 3천만 달러 규모의 입찰에 성공했다. 선반과 밀링 등 직업훈련용 공작기계를 납품하게 된 것이다.

이 회장이 입찰에 딴 규모는 창원과 대구, 울산, 대전 등 국내 공작기계 생산 공장들이 들썩일 정도로 대규모 물량이었다. 사업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이 공로로 1985년 석탄산업훈장을 받았다.

저작권자 © 글로벌 비즈 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